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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디어 왓차 후기 – 성스러운 사슴은 누구인가, 복수와 윤리가 충돌하는 순간

by dongsgram 2025. 6. 11.

 

 

‘킬링 디어(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그리스 신화의 비극을 현대적 도덕 딜레마로 재해석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완벽해 보이는 외과의사 가족과 의문의 소년이 얽히며 벌어지는 불가해한 상황은 관객에게 불편한 긴장과 윤리적 질문을 던집니다. 란티모스 특유의 정적이고 감정 없는 연출은 공포의 본질을 한층 더 섬뜩하게 전달합니다.

 

 

신화를 닮은 비극 – 란티모스가 쌓아올린 윤리의 미로

『킬링 디어』는 단순한 공포 영화도, 전형적인 스릴러도 아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현대적 인간 윤리의 붕괴와 도덕의 가면

고대 그리스 신화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을 모티브로 냉정하게 재현한다. 영화는 유명 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파렐)과 그의 완벽한 가족,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소년 마틴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초반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낯선 소년이 점점 가족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이후부터 영화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허문다

. 마틴은 스티븐에게 말한다. “당신이 내 아버지를 죽였어요. 이제 당신도 당신의 가족 중 하나를 죽여야 해요.” 그 말은 말도 안 되는 협박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가족은 하나씩 병들어간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병, 무기력한 다리, 코피, 식욕 부진, 그리고 죽음. 스티븐은

과거 수술실에서의 과실을 떠올리며 점점 죄책감에 잠식

된다. 하지만 마틴은 책임을 묻는 대신 희생을 요구한다. “가족 중 한 명을 선택해서 죽이면 다른 사람은 살릴 수 있다.” 이제부터 영화는 선택의 윤리, 복수의 본질, 인간 존재의 책임감에 대해 잔혹하고 철학적인 방식으로 후기를 전개한다.

 

 

마틴이라는 존재 – 신의 대리자인가, 복수의 화신인가

마틴은 스티븐과 마주하기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는 듯 행동한다. 그는 거리낌 없이 스티븐의 가족에게 접근하고, 딸과 가까워지고, 집에도 놀러오며 낯선 친밀감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 친밀감은 결국 통제 불가능한 공포로 변한다. 그는 갑자기 스티븐의 가족이 병들게 된 사실을 말하고,

“이건 균형을 맞추기 위한 자연의 법칙”

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말은 마치 고대 신탁을 전하는 예언자 같다. 실제로 마틴은 고대 비극에서 신의 징벌을 대리하는 사자 같은 존재다. 하지만 영화는 그가 과연 진짜로 무언가를 조종하는 존재인지 혹은 단지

비극을 만들기 위한 상징적 장치인지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 애매함이 영화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관객은 마틴을 공감할 수 없다. 그는 감정이 없고, 기계적으로 복수를 요구한다. 이런 비인간적인 모습은 관객이

공포를 느끼는 진짜 이유

다. 공포는 괴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제거된 질서에서 비롯된다. 마틴은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는 절대적 정의를 들고 나와

스티븐에게 가장 잔혹한 선택

을 요구한다.

 

 

스티븐의 몰락 – 도덕과 책임 사이에서 무너지는 인간

스티븐은 의사다. 인명을 구하는 직업이며,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이다. 겉보기엔 완벽한 지성과 품격을 갖춘 인물이다. 하지만 마틴의 등장 이후, 그의 이성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들이 걷지 못하게 되고, 딸도 병에 걸린다. 아내는 점점 스티븐에게서 떨어져나가며 집안은 혼돈의 나락으로 빠진다. 그는 병원, 지인, 경찰 모두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이 사태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결국 그는 인정하게 된다. 이건 어떤 과학도 설명할 수 없는 ‘형벌’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틴이 요구한 조건. “가족 중 한 명을 택해 죽여야 다른 이들이 살 수 있다.” 그는 처음엔 거부하지만 점점 그 선택 앞에 무릎 꿇게 된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잔혹해진다. 그는 아들, 딸, 아내 모두를 앞에 두고

총을 들고 눈을 가린 채 무작위로 총을 쏜다

. 선택하지 않으려 한 그의 마지막 시도는 윤리의 포기였고, 그마저도 죽음 앞에서는 무너진다. 이 장면은

신 앞에서 선택을 강요당한 인간의 무력함

을 보여준다. 그는 의사였지만 가장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가족을 지켰다. 혹은 살아남게 만들었다. 이 장면은 도덕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이란 정당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남긴다.

 

 

연출의 냉정함 – 공포는 감정이 제거된 화면에서 시작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연출은

철저히 계산된 거리감

위에서 작동한다. 카메라는 늘 정적이고, 인물들의 대사는 감정이 빠진 단조로운 톤으로 전달된다. 이는 관객이

장면 자체의 의미와 구조를 더 깊이 해석

하게 만든다. 배경 음악은 최소화되었으며, 죽음과 병마조차도 설명 없이 다가온다. 마치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형벌이며, 이해하려 하지 말고 느끼라’는 듯한 태도다. 공포는 괴물이나 살인자가 아니라,

논리와 윤리가 모두 실패했을 때 남는 침묵 속에서 피어난다

. 관객은 마틴이 왜 그런 힘을 가졌는지 끝내 알 수 없고, 스티븐이 왜 그 죄를 짊어졌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이 이 영화가 ‘불쾌하지만 위대한’ 이유다. 란티모스는 관객에게 감정을 맡기지 않는다.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오히려 감정을 증폭시킨다

. 『더 랍스터』, 『더 페이버릿』에 이은 그의 비극 3부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킬링 디어』는 그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고 가장 침묵이 깊은 작품이다.

 

 

킬링 디어 – 신은 누구를 용서하지 않는가

『킬링 디어』는 가족, 책임, 윤리, 선택이라는 테마를 극도로 차가운 방식으로 요리한 신화적 공포극이다. 마틴은 신이 보낸 사자일 수도, 복수심에 사로잡힌 소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선택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는 진실

을 알려줬다는 점이다. 스티븐은 가족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 가족을 무작위로 죽이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선택은 무책임인가, 책임인가? 이 질문은 누구도 답을 줄 수 없는 윤리의 미궁이다. 『킬링 디어』는 당신의 도덕, 당신의 감정, 그리고 당신의 신념을 시험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식당에서 스티븐과 가족은 마틴을 외면한다. 그들은 살았지만

영원히 죄의 그림자를 마주한 채 살아가야 한다

. 그래서 묻는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아니, 당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까?